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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

천재수학자 오일러

허당쌤 2022. 10. 13.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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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독일 월드컵의 공인구로 지정된 '팀가이스트'는 기존의 축구공들과는 달리 '오일러의 공식'을 만족시키지 않는다고 하여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오일러의 공식이란 다면체에서 '꼭짓점의 수 - 모서리의 수 + 면의 수 =2'라는 공식이 항상 성립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팀가이스트는 이전의 축구공과는 달리 14개의 조각만으로 만들어졌으며, 게다가 조각들의 모양도 기하학적으로 단순한 다각형 모양이 아니었다. 월드컵 트로피를 둥글게 단순화한 모양의 조각 6개와 삼각 부메랑 모양의 조각 8개로 구를 이루고 있는 것이었다.

 

축구공을 이렇게 만든 이유는 이음매가 적을수록 공의 반응성이 좋아지기 때문이며, 조각과 조각이 이어진 자리는 울퉁불퉁해서 선수가 킥을 해도 원하는 것과는 달리 엉뚱하게 날아갈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완벽하게 둥글고 매끈한 표면을 가진 공일수록 어디를 차든 동일하게 반응한다는 것인데, 팀가이스트는 조각들이 모인 접합점의 수와 조각들 사이의 이음매 수를 최대한 줄여 정확성을 높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화제가 되는 '오일러의 공식'은 명칭에 짐작할 수 있듯이 '오일러'라는 사람이 밝혀낸 수학적 정리인데, 이 사람은 수학사에 단연 빛나는 업적을 남긴 위대한 수학자이자 인간적으로도 귀감이 될 만한 훌륭한 인물이다.

 

1721년 프랑스 학술원은 그 해의 논문 경연대회에서 약관의 20세 청년에게 2등 상을 주었는데 그가 제출한 논문은 돛대의 이상적인 위치를 결정하는 방법을 논한 것이다. 그런데 그 수학자는 돛대나 배는커녕 바다도 본 적 없는 내륙국가 스위스 출신인 바로 오일러였다. 그가 수학사에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난데, 오늘날 표준으로 쓰이는 대부분의 기호나 용어들이 대다수는 그가 처음 만들어낸 것이다.

 

예를 들어 삼각함수를 나타내는 약어 sin, cos, tan나 자연로그의 밑을 나타내는 상수 e도 그가 고안한 것이다. 그리고 원주율 기호 파이도 처음 쓴 사람은 윌리엄 존스지만 오일러가 사용하면서 표준으로 굳어졌으며 함수를 나타내는 f(x)도 그가 창안한 것이다. 게다가 그의 이름이 붙은 수학적 정리도 무수히 많다.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1707년에 스위스에 바젤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수재였으며 그는 수학에 관심이 많던 아버지에게서 가르침을 받다가 나중에는 다니엘과 니콜라우스라는 두 형제와 친하게 지냈는데, 이들은 오일러와 마찬가지로 수학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이었는데 이 교우 관계는 나중에 오일러가 대수학자로 성장하는데 적잖은 영향을 끼친 듯하다. 이들 형제는 스위스에서도 알아주는 수학자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형제의 아버지는 역시 수학자인 요한 베르누이라는 사람이었으며, 그들의 큰아버지는 베르누이의 정리로 유명한 수작자 야콥 베르누이였다. 야콥 베르누이와 요한 베르누이 형제는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의 첫 외국인 회원으로 동시에 선출된 기록을 지니고 있을 정도로 수학자로서 명성이 자자했으며, 이런 훌륭한 지인들이 있었기에 오일러의 타고난 재능은 더 빛을 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일러 수학자로서 이름을 날리게 된 것도 다니엘과 니콜라우스 형제 덕분이데, 이들은 러시아 여왕 에카 테라나 1세를 설득하여 오일러를 러시아로 초빙하게 했는데 오일러 나이 20세 때의 일이며 초빙 수학자가 너무나 젊어서 사람들의 시선에 의혹이 담겼을지도 모르지만 수학적 재능은 원래 나이와 무관한 법이니, 당시 러시아 학술원에서는 천문학의 난제 하나를 제시하고 학자들로 하여금 답을 구하게 했는데 아무도 해결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오일러는 자기만의 독창적인 방법을 적용하여 단 사흘 만에 해답을 내놓았던 것이다.

 

이 일로 젊었던 그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무리한 양의 작업을 계속 떠맡아야 했으며 그러다가 그만 오른쪽 눈이 멀고 말았던 것이다. 지도 작성에 열중하던 1738년의 일이다.  1741년에 오일러는 다시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빙으로 프로이센 왕국의 베를린으로 가서 베를린에 학사원을 부흥시켜 예술과 학문의 발전을 후원하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학사원의 수학 부장을 맡은 오일러에게도 극진한 대접을 해 주었다.

 

그런데 당시 러시아의 여와 에카테리나 2세가 또 오일러를 청하는데 한쪽 눈의 시력을 잃어버린 러시아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집요한 여왕의 초빙 권유 1766년에 다시 러시아로 가게 된다. 러시아의 혹한에 남은 한쪽 눈마저 멀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오일러의 위대함은 그런 상황에서 오히려 더 빛을 발했는데 그는 두 눈이 안 보이는 조건에서도 머릿속에 든 기억과 지식만으로 수학 연구를 계속했던 것이다. 1783년 향년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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