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자란? 수학을 주로 연구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수학자는 수학적 지식을 증진 시키기 위한 연구 업무를 수행하며, 생명과학, 물리학, 사회학, 보험학 및 공학 분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기술을 개발, 응용하는데 관련된 수가적 업무를 수행하기도 합니다. 전문 연구 분야에 따라서 순수수학자, 응용수학자로 구분되며, 수학이 관련되지 않ㅇ니 부야가 거의 없는 21세기에서는 수학잗ㄹ의 역할도 더욱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또, 4차산업혁명에서 수학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수학자들이 관여하는 분야도 즐어나고 있습니다. 고대 수학자들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최초의 수학자는 바로 탈레스다. 확실하진 않지만, 피타고라스도 탈레스의 제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탈레스가 당시 노년이었기에 탈레스의..
에바리스트 갈루아 유년기 1811년 10월 25일 프랑스의 소도시 부르 라 렌 시장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시골 학교의 교장으로 재작 하다 시장에 당선된 이후 17년 동안이나 쭉 시장을 역임했으니 갈루아는 상당히 좋은 집안 출신인 셈이다. 12살에 고향을 떠나 명문 기숙학교 '리세 루이 르 그랑'에 입학하여, 언어 방면에서 천재적인 면모를 보이며 교사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 15살에 우연히 프랑스 수학자 아드리앵 마리 르장드르가 쓴 을 접한 갈루아는 2년 과정으로 쓰인 그 책을 단 이틀 만에 모조리 읽어냈다고 전해지며, 그것도 학생들을 대상으로 쓴 교재가 아닌 그 당시 수학자들을 대상으로 쓴 전문 서적을 독파한 것이며, 그야말로 엄청난 열정과 압도적 재능이 있었기에 전해질 수 있는 일화도 있다. ..
프랑스의 수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누구인가 르네 데카르트는 근대 철학의 포문을 연 프랑스의 철학자, 수학자, 과학자이며, 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의심하더라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진리라 확신하고는, 이를 모든 학문의 제1 원리로 정립하였다고 한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는 존재한다'는 학문의 제1 원리를 기반으로 하여 다시 신 존재를 증명해내고, 이를 다시 물질세계의 진리성을 확보하기 위한 발판으로 마련하여 마침내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물질 세게의 확실한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논리적 근거의 순서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물질세계에서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 물질이 특정한 공간을 차지한다'는 사실이며 '연장'에 있다고 보고 이로써 물질..
2006년 독일 월드컵의 공인구로 지정된 '팀가이스트'는 기존의 축구공들과는 달리 '오일러의 공식'을 만족시키지 않는다고 하여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오일러의 공식이란 다면체에서 '꼭짓점의 수 - 모서리의 수 + 면의 수 =2'라는 공식이 항상 성립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팀가이스트는 이전의 축구공과는 달리 14개의 조각만으로 만들어졌으며, 게다가 조각들의 모양도 기하학적으로 단순한 다각형 모양이 아니었다. 월드컵 트로피를 둥글게 단순화한 모양의 조각 6개와 삼각 부메랑 모양의 조각 8개로 구를 이루고 있는 것이었다. 축구공을 이렇게 만든 이유는 이음매가 적을수록 공의 반응성이 좋아지기 때문이며, 조각과 조각이 이어진 자리는 울퉁불퉁해서 선수가 킥을 해도 원하는 것과는 달리 엉뚱하게 날아갈 확률이 높..
뫼비우스 그는 누구인가? 독일의 천문학자 겸 수학자 뫼비우스는 가우스에게 천문학을 배웠으며, 동차 좌표 개념의 도입, 도형의 기하학적 친연성의 계통적 연구, 쌍대 원리의 고찰 등 수학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뫼비우스의 띠로 유명하다. 뫼비우스 띠는 수학의 기하학과 물리학의 역학이 관련된 곡면으로 경계가 하나밖에 없는 이차원 도형이며, 이 띠는 1858년에 독일의 수학자 뫼비우스와 요한 베네딕트 리스팅이 서로 독립적으로 발견했다. 이 띠를 발견한 뫼비우스는 대중적인 천문학 논문인 뿐만 아니라 정역학, 천체역학과 다양한 많은 수학적 논문을 발표한 천문학교수였으며, 오늘날 그는 뫼비우스의 띠로 더 유명하고 그가 천문학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뫼비우스는 1790년 11월 17일에 태어났으며, 그는 ..
영국의 수학자, 과학자이자 신학자. 과학혁명에 가장 큰 공헌을 세운 과학자이다. 아이작 뉴턴의 생애 유년기 불행했으며,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세상을 떠난 그다음 해 크리스마스이브와 크리스마스 사이 밤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미 죽어 유복자였으며 1개월 일찍 태어난 미숙아라 몸이 양말에 들어갈 정도로 작았다. 3살에 어머니 해나 애스큐가 재혼을 해 집을 떠나는 바람에 뉴턴은 외할머니 마저리 애스큐의 집에 남겨지게 되었다. 뉴턴은 처음부터 공부에 두각을 보인 것을 아니며, 처음 입학하였을 때 뉴턴의 성적은 중하위권이었는데 당시 뉴턴보다 조금 더 성적이 나았던 한 학우와의 다툼 후에 그에게 경쟁심을 가져 공부를 진지하게 시작하게 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학위는 따라잡았으나 이미 뉴턴은 공부에 재비를 붙여 ..
대수학 해석학 기하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19세기 최대의 수학자라고 일컬었다. 수학에 이른바 수학적 엄밀성과 완전성을 도입하여 수리 물리학으로부터 독립된 순수수학의 길을 개척하여 근대 수학을 확립하였으며, 특히 전자기학 천체역학 중력론 측지학 등에도 큰 공헌을 했다. 브룬스 비크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빈궁한 가운데 성장하였으나, 일찍부터 뛰어난 소질을 보였 어머니와 숙부의 노력으로 취학하여 10세 때 등차급수의 합의 공식을 창안하는 등 신동을 알려져 브룬스 비크 공 페르디난드에게 추천되어 카롤링 고교를 거쳐 괴팅겐대학에 진학, 고교시절에 이미 정수론 최소제 공법 등으로 독자적인 수학적 업적을 올렸는데, 괴팅겐대학 재학 시절에 정 17 각형의 문제에 열중한 것이 수학의 길을..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피타고라스, 만물의 원리는 수라고 주장하였으며, 철학이라는 말을 맨 처음으로 사용하고 자신을 철학자라고 부른 최초의 사람이다. 피타고리스의 생애 보석 세공사 므네사르코스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사모스 섬 출신이다. 젊은 피타고라스는 배우고 싶은 열망에 고국을 등지고 여행을 떠나 그리스뿐만 아니라 이민족의 비밀스런 가르침에도 입문했다. 이렇게 해서 그가 이집트에 머물러 있었을 때 시모스의 유력자 폴리크라테스가 편지를 통해 그를 이집트의 왕 아마시스에게 추천햇고, 이곳에서 피타고라스는 이집트 말을 통달했다. 이후 그가 40살이 되었을 때 다시 사모스 섬으로 돌아왓으나 조국이 폴리크라테스에 의해 참주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의 압제를 참고 견디는 것은 자유인으로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