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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비우스 그는 누구인가?

독일의 천문학자 겸 수학자 뫼비우스는 가우스에게 천문학을 배웠으며, 동차 좌표 개념의 도입, 도형의 기하학적 친연성의 계통적 연구, 쌍대 원리의 고찰 등 수학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뫼비우스의 띠로 유명하다.

 

뫼비우스 띠는 수학의 기하학과 물리학의 역학이 관련된 곡면으로 경계가 하나밖에 없는 이차원 도형이며, 이 띠는 1858년에 독일의 수학자 뫼비우스와 요한 베네딕트 리스팅이 서로 독립적으로 발견했다. 이 띠를 발견한 뫼비우스는 대중적인 천문학 논문인 <핼리혜성과 천문학의 원리> 뿐만 아니라 정역학, 천체역학과 다양한 많은 수학적 논문을 발표한 천문학교수였으며, 오늘날 그는 뫼비우스의 띠로 더 유명하고 그가 천문학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뫼비우스는 1790년 11월 17일에 태어났으며, 그는 독일 작센의 슐포르타에서 내어나 1809년에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해 법학을 공부하였지만, 1년도 지나지 않아 수학, 천문학, 물리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그는 괴팅겐 대학에서 1813 ~ 1814년 가우스로부터 천문학을 배웠으며, 할레 대학에서 가우스의 스승인 파프로부터 수학을 배웠다.

 

당시 뫼비우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수학과 천문학에 조예가 깊은 독일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몰바이데였으며, 몰바이데는 처음에 라이프치히 대학의 천문학교수였다가 1816년에 수학과 자리를 옮겼고, 뫼비우스가 그 뒤를 이어 천문학 및 고동 역학 조교수가 되었다. 뫼비우스는 2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라이프치히 대학의 천문학 및 고등 역학 조교수직을 얻었지만 오랫동안 정교수로 승진하지 못했다.

 

1825년 몰바이데가 죽자, 뫼비우스는 그의 자리를 물려받아 수학과 교수로 옮겨가고 싶었지만 좌절되며, 그 이후 연구에 더욱 정진한 뫼비우스가 연구가로서 점점 명성을 얻게 되자 1844년 예나대학에서 그를 초빙하려고 하자 라이프치히 대학은 그때까지 조교수로 남아있던 그를 28년 만에 정교수로 승진시키며 남아주길 바란다. 뫼비우스는 1846년 작센 왕립 과학회의 공동 창립자로 학회를 설립하고 1848년부터 1861년까지 라이프치히에 있는 천문대 대장을 역임한다.

 

수학에 관한 그의 논문은 대부분 기하학에 관한 것으로 주로 독일의 수학 전문 학술지 <크렐레>에 실렸으며 그의 논문 대부분은 1827년 발표한 논문인 <중력 중심의 계산>에서 주장했던 방법을 응용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이 논문에서 기하학적 변환과 동차 좌표계에 관한 내용과 오늘날의 뫼비우스 넷이라 불리는 새로운 형태의 기하학을 소개해 기하학의 새로운 발전을 이끌었으며, 1837년에 발표한 <정영학 편람>에서 정역학을 기하학으로 다뤄 점과 면의 영계와 공간의 선체계를 이끌어내며 위상수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오늘날 그의 이름이 붙은 것으로 뫼비우스 함수, 뫼비우스 변환, 뫼비우스의 띠 등이 있는데, 그중 뫼비우스의 띠는 1858년에 발견했으며, 이에 관한 논문을 프랑스 과학원에 제출했지만 논문은 그가 죽은 뒤에야 출판되었다.

 

뫼비우스의 띠는 어떻게 발견되었을까?

뫼비우스가 해변으로 후가를 떠났을 때 일이다. 밤이 되자 그의 숙소에는 많은 수의 파리가 날아들었으며, 그는 파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양면에 접착제를 바른 띠를 구해왔으며, 이 띠를 반 바퀴 돌려 띠의 양 끝을 서로 연결한 뒤에 묵고 있던 방의 기둥에 걸어놓았는데, 이 띠는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그날 밤 그는 파리의 방해 없이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뫼비우스는 파리가 잔뜩 붙어 있는 띠를 보았는데 놀랍게도 그 띠는 단 한 개의 면과 단 한 개의 모서리를 갖고 있었고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오늘날의 뫼비우스 띠가 탄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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