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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리스트 갈루아 유년기

1811년 10월 25일 프랑스의 소도시 부르 라 렌 시장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시골 학교의 교장으로 재작 하다 시장에 당선된 이후 17년 동안이나 쭉 시장을 역임했으니 갈루아는 상당히 좋은 집안 출신인 셈이다. 12살에 고향을 떠나 명문 기숙학교 '리세 루이 르 그랑'에 입학하여, 언어 방면에서 천재적인 면모를 보이며 교사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

 

15살에 우연히 프랑스 수학자 아드리앵 마리 르장드르가 쓴 <기하학 원론>을 접한 갈루아는 2년 과정으로 쓰인 그 책을 단 이틀 만에 모조리 읽어냈다고 전해지며, 그것도 학생들을 대상으로 쓴 교재가 아닌 그 당시 수학자들을 대상으로 쓴 전문 서적을 독파한 것이며, 그야말로 엄청난 열정과 압도적 재능이 있었기에 전해질 수 있는 일화도 있다.

 

이후 갈루아는 수학에 지나칠 정도롤 집착하여 학교생활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상급 학교인 에콜 폴리테크니크로 가는 것과 이름난 수학자들을 만나 전문 수학을 공부하는 것만이 목표가 되었으며, 문제는 수학 이외 다른 과목들은 낙제를 했다는 것이며, 또한 자신보다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동급생이나 교사를 무시하기 일쑤였기 때문에 학교 내에서도 따돌림을 당했고, 타인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의사소통 능력의 부족이 갈루아의 가장 큰 단점이었으며, 생활 기록부에도 갈루아의 정신 상태가 광기라고 적혀 있으며, 심지어 이해심 많은 갈루아의 어머니조차 아들이 정신병이라고 우려할 정도이다.

에바리스트 갈루아 첫 번째 불운

부르라렌의 시장이었던 아버지는 프랑스혁명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부친의 영향을 받아 갈루아 역시 혁명가를 꿈꾸었는데, 그래서 갈루아는 당시 젊은 혁명가들이 모이는 곳이자 유럽의 학술적 업적이 탄생하는 중심지인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입학하고자 했으나, 불행하게도 낙방하였으며, 에콜 폴리테크니크는 재수까지만 허용되었기 때문에 갈루아는 이를 악물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이 시기 갈루아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교수로 재직하던 오귀스탱 루이 코시 에게 직접 자신의 발견을 적은 소포를 보낸다.

 

소포 안에는 5차 방정식의 대수적인 해법이 없음을 증명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고, 코시는 그 안에 담긴 아이디어에 매료되었으며, 17살에 불과한 소년 갈루아가 당대 최고의 수학자인 코시를 놀라게 한 것이며, 그러나 갈루아는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입학하지 못했으며, 갈루아가 입학 시럼을 준비하던 중 공화주의자였던 아버지가 정치적 음모에 희생당해서 목을 매어 자살해 버린다.

에바리스트 갈루아 두 번째 불운

이후 갈루아는 에콜 폴리테크니크 대신 에콜 프레 파라 투아에 입학하며, 그는 에콜 폴리테크니크 입학이 무산되자 전에 코시에게 보낸 논문에 모든 기대를 걸었지만, 설상가상으로 코시마저도 건강상의 이유로 갈루아의 논문을 발표하는 걸 미루었다가 그대로 잊어먹어 버렸으며, 이후 다시는 코시가 갈루아의 논문을 언급하는 일은 없다. 그러자 갈루아는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한번 자기의 논문을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제출했으며, 그 눈문은 장 바티스트 조제프 푸리에의 손에 들어갔는데 푸리에는 갈루라의 논문을 받고 몇 주 후 열병으로 사망했으며, 결국 갈루아의 논문은 또다시 분실된다.

에바리스트 갈루아 세 번째 불운

에콜 프레 파라 투아에서 퇴학당한 이후, 갈루아는 지금을 마련하기 위해 공개 강의를 열었으며, 그는 자신의 수학적 연구 결과들을 강의에서 발표했으며, 청중 중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자 그랑프리의 심사위원인 시메옹 드니 무아송도 있었으며, 푸아송은 갈루아의 강의를 듣고 다시 한번 아카데미 프라세즈에 연구 결과를 제출해 달라고 요구했으며, 갈루아는 다시 한번 인정받을 기회를 얻었으며, 이번에도 몇 달이 지나도록 갈루아의 연구 결과에 대해선 아무 소식이 없다.

젊은 천재의 죽음

일주일 후, 갈루아는 공화주의 시위를 하던 도중 사소한 이유를 계기로 체포되어 6개월 금고형을 선고받았으며, 감옥에서 갈루아는 수학을 자신의 유일한 위안거리로 삼고 연구하며 지냈다고 하며, 그는 의외로 감옥 내에서 다른 사람과 잘 어울려 지냈다고 하며, 한 번은 그가 부당한 대우를 받자 죄수들 사이에서 분노가 터져 나왔다고 하며, 1832년 봄, 파리에 콜레라가 유행하자 관계 당국은 젊은 수감자들이 감옥에서 죽는 것을 막기 위해 병원으로 이송된다.

 

그 안에는 갈루아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병원에서 갈루아는 병원 의사의 딸이었던 스테파니를 만나 사랑에 빠졌으며, 그러나 스테파니는 그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며, 갈루아가 스테파니가 보낸 편지를 모두 찢어버려서 불태웠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갈루아의 수학 논문 뒤편에서 확인된 편지의 내용에 따르면 스테파니는 그냥 친구로 지내길 원한다면서 갈루아를 거절한다.

 

갈루아가 죽기 며칠 전의 일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으며, 사랑했던 여인 스테파니를 둘러싼 결투 때문이라는 말도 있으며, 혁명가인 갈루아가 스스로를 혁명의 제물로 삼았다는 말도 있으며, 게다가 누군가에게 의도적으로 죽었다는, 즉 살해되었다는 말도 있으며, 결정적으로 갈루아를 죽인 범인조차도 밝혀지지 않았다. 갈루아가 짧은 인생 동안 열정적으로 하도 많은 결투를 치러서 그가 이 결투에서 죽지 않았다면 다음 결투에서 죽었을 것이다 라는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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