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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피타고라스, 만물의 원리는 수라고 주장하였으며, 철학이라는 말을 맨 처음으로 사용하고 자신을 철학자라고 부른 최초의 사람이다.

 

피타고리스의 생애

보석 세공사 므네사르코스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사모스 섬 출신이다. 젊은 피타고라스는 배우고 싶은 열망에 고국을 등지고 여행을 떠나 그리스뿐만 아니라 이민족의 비밀스런 가르침에도 입문했다. 이렇게 해서 그가 이집트에 머물러 있었을 때 시모스의 유력자 폴리크라테스가 편지를 통해 그를 이집트의 왕 아마시스에게 추천햇고, 이곳에서 피타고라스는 이집트 말을 통달했다.

 

이후 그가 40살이 되었을 때 다시 사모스 섬으로 돌아왓으나 조국이 폴리크라테스에 의해 참주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의 압제를 참고 견디는 것은 자유인으로서는 잘 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는 이탈리아의 크로톤으로 떠났으며, 그곳에서 이탈리아의 그리스 정착민들을 위해 법률을 제정하고 피타고라스 학파를 세워 제자들과 함깨 성공적으로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거의 300명에 달하는 그의 제자들은 나랏일을 최선으로 관리했기 때문에, 그 정치체제는 사실상 '최선자지배정'이라 불릴 정도였다.

 

90세의 피타고라스는 제자들과 함께 밀론의 집에서 모임을 갖고 있었는데, 입문의 자격이 없다고 판정받은 자들 가운데 누군가가 질투심으로 말미암아 그 집에 불을 지르는 일이 벌어졌지만 어떤 사람들은 크로톤의 시민들이 피타고라스가 참주를 수립할까봐 그걸 경계해 불을 질렀다고 했다. 가까스로 불타는 집에서 탈출한 피타고라스가 마주한 것은 넓은 콩밭이었고 그 콩밭을 가로질러 가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콩을 밟기보다는 차라리 이곳에서 붙잡히자. 말로만 떠드느니 죽임을 당하는 것이 낫다'고 말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추격자에게 잡혀 목이 베였다고 한다.

피타고라스의 사상

물질적 요소가 아니라 구조와 형식 혹은 수학적 관계들을 바탕으로 세계를 파악하며, 그는 수학을 통해 자연의 '빗장을 풀'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근거를 통해 자신의 논리를 증명했다.

  1. 화성학은 수학과 음악처럼 비물질적인 것 간으 일치를 보여준다.
  2.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수학이 물질적 사물에도 적용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3. 천체들의 원운동은 우주의 별과 태양도 모두 수학을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피타고라스 학파는 수학적 구조가 모든 사물의 근본이라고 믿었으며, 이러한 생각은 다른 논변들에 의해서도 뒷받침되었으며, 사물들은 사라지지만 수학적 개념들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수학은 자연 속에서 불변적인 것이고, 수학적 지식은 그 대상이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확실한 지식이다. 나아가 수학적 지식의 확실성은 수학적 정리들이 논리적으로 증명되었다는 사실로부터도 나온다. 따라서 피타고라스 학파 사람들은 이중적 의미에서 합리주의자들이었다.

  1. 그들은 수적 증명의 형태로 합리적 논변들을 제시하였다.
  2. 그들은 실재가 모든 감각적 현상의 '근저에 놓여 있는'수학적 형식들이라고 믿었으며, 따라서 우리는 감각이 아니라 이성(ratio)을 통해서 실재에 대한 지식을 획득한다고 믿었다.

이런 의미에서 피타고라스 학파는 자신들이 우주의 수수께기를 풀 수 있는 열쇠를 발견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들은 합리적인 논변에서 더 나아가, 수학이 이성을 넘어서는 무언가 신비로운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합리주의적 수학에 기반을 둔 종교적 신비주의라고 할 수 있다.

수학자인 피타고라스

흔히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그가 증명했다고 여겨지지만, 아쉽게도 해당 통설을 뒷받침할 만한 당대의 자료들이 없어 교차검증은 되지 않고 있으며, 우선 신빙성 있는 초기 자료들을 살펴볼 때 확실한 것은 그가 혼의 전이설을 주장한 사람이며,수와 관련된 그의 글 중 초기 자료에 해당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단편으로 여겨지는 '피타고라스적 삶에 대하여'뿐인데, 여기서 '피타고라스 정리'에 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피타고라스 정리'에 대한 기록은 피타고라스의 후기 자료 중 하나인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저서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에서 언급된 아폴로도로스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는 직각삼각형의 빗변의 제곱이 직각을 둘러싼 각변의 제곱의 합과 같다는 것을 발견하고서 황소 100마리를 제물로 바쳤다.'라고 한다. 여기서 '발견했다'는 말을 '증명했다'는ㄴ 뜻으로 이해하긴 어려우며, 초기자료에서 이에 대한 그너가 될 만한 것이 없으며, 수학의 증명방법이 등장한 것은 기원전 5세기 말에서 4세기 초였기 때문이다. '발견했다'를 '증명없이 최초로 알아냈다'라고 보기도 어렵다.

 

피타고라스 이전의 바빌로니아와 이집트 사람들도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나타내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피타고라스가 수학 발전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였다고 보기엔 어렵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를 중심으로 그의 학파가 수학을 진리로 믿고 수학적 사실들을 전승해 온 공로까지 부정할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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